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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이웃공개

친구


친구? 곁에 두고 오래 사귀는 벗?
이제는 지루하고 식상해 그 문장만으로도 군내나는 이 해석은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친구와 좀 아는 사람을 구분해가며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면서 이 지긋지긋한 친구의 의미는 열없이 각인된다.
'친구'라는 단어의 강제된 고결성이 친구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게 하는 나이가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미끄럼틀 아래에서 모래 장난을 하다 처음 만난 아이의 손을 잡고 대문을 넘기 전부터 "엄마, 찐구 왔어, 찐구"하던 시절은 다시는 없다.

아르바이트나 혹은 그밖의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사람이 죽이 잘 맞아 오래 같이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다 함께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 앞에서 그를 동료라고 말할 뿐, 친구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학이 되면 한달에 한 번 볼까말까 한, 한두 통의 전화가 서로 오락가락하는 대학교 동창은 친구일까?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곁에 두고 오래 사귀니 친구인 걸까?

친구는 어떤 관계의 사람을 일컫는 것일까? 오랫동안 수첩을 들여다 봤다.
친구라는 포스트 잇은 볼꼴 못 볼꼴 다 본 어린 시절의 이름곁에만 마킹됐다.
 

정말 친구는 아무때고 네게 전화해 나야 하며 말을 꺼내도 누군지 한번에 알아내는 그런 사람인 걸까?
적어도 언제 어디서라도 서로에게 끈이 닿는다면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목소리에 묻어온 바람 한자락만으로도 그 마음을 송두리째 다 헤아릴 수 있는 '너무 잘 아는 사람'만이 친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걸까?

한동안 나는 친구들이 많은 사람으로 살았다.
그들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이름으로 불리우기보다는 호형호제했을 뿐, 개념은 친구였다. 동갑끼리만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쨌든 친해진 후에는 그들의 생일이나 갑자기 모이게 된 술자리, 고즈넉한 저녁 식사와 왁자지껄한 수다가 있는티 타임에도 무릎이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그들과 친교했다. 친교가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난 그들의 늙은 친구였고, 그들은 내의 어린 친구였을 뿐이었으니까.
그 시절은 짧지 않게 지속됐다.
나는 친구의 자취방에 퍼질러 앉아 삶은 지 며칠 된 것 같은 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키득거렸고, 훌쩍이는 친구의 등을 안고 쓴 소주잔을 채우기도 했다.
물론 그들 역시 소소한 나의 일상을 관통하며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나눠가졌다.

하지만 친구라는 개념이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친구가 아닌 '아는 애'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끼쳐오는 모멸감을 느꼈다.
난 그들의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옆에서 끝없는 찬양가를 불러주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칭찬에 귀가 얇은 친구를 볼 때마다 마찰을 피하는 비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친구라는 이유로 끝나지 않을 찬양시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좀 아는 애로 소개된 나는 그들과 더는 친교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주변에서 '예쁘다'혹은 '성격 짱'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생하듯 친교할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우정 역시 단단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가르침은 썼지만 효과는 비굴한 처세로 드러났다. 찬양시는 쓰지 않겠지만 고언을 직설화법으로 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여차하면 친구가 아닌 '아는 애'가 되어버리고 말 위험하고 치사한 관계는 더 만들기가 싫었다. 비겁한 양보였다.

친구는 다 자라서는 만드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서글픈 자각을 느꼈다.

한쪽은 끊임없이 이미 너절해진 마음의 편린들을 쏟아내기만 하고 또다른 한쪽은 그 편린들을 맞추고 꿰매어 돌려만 준다면 이들이 과연 친구일까? 그런 것은 정신과의사, 고해소 안의 신부 등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 아닐까?
물론 친구로서의 역할 분담은 전적으로 그들만의 문제다.

사람이 사람을 사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로의 촉수가 같은 주파수를 찾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인가는 큰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시작이 아니라 과정이다.
관계가 성숙되려면 숙성될 시간이 필요한데 나이라는 한 축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황섞어 젓도 맛이 들려면 곰삭아야 한다. 자꾸 뚜껑을 열고 손가락을 넣어 이물질이 들어가고, 꺼내보고 뒤적이는 동안 젓갈은 상해버리고 만다. 아예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들도 심장이 뛰는 사람인데 왜 친구가 될 수 없겠는가? 단지 마음이 삭혀질 시간이 없고, 두 마음이 버무려질 환경이 아니며, 그 맛이 어떤지 궁금해하는 타액 묻은 손가락 담금질이 너무 심하고, 그래서 벌레가 들면 서로의 탓이라 욕하고, 그러다 보면 먹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삭혀서 나누는 마음'에는 그들이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됐다.
잘못된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그들은 마음 하나 섞어 삭힐 줄 모르는 새로운 인간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 친구, 관계.... 결국, 사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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